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나의 회상" 2월 27일 광주 전대병원 다녀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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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회상" 2월 27일 광주 전대병원 다녀옴

by 요로콤 3 2025.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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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남대학병원을 다녀온 이야기를 하려면 세월은 거의 24년전으로 돌아가야 지금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24년전 저의 26살의 한창 팔팔했던 시절이었던 청춘 시절의 꿈많은 한 청춘의 불행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한창때 였던 저는 26의 살때 정말 친구들도 많고 옆의 지인들이 정말많았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8년 연애 끝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을 앞두고 있는 예비 신랑이었구요....

 

지금 다시 회상하면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한순간의 꿈만 같았던 시절이네요~

 

참 이글을 다시 회상하면서 저의 젊음을 토해 내려고 하니까 한숨이 절로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에 저는 전에 다니던 일반 페인트가게에서 페인트 배달일을 그만두고, 한때 한창 유행이었던 동네에서 어르신들을 상대로 노래와 춤을 선보여주면서 어르신들의 건강을 좀더 좋아지게끔하는 취지에서 건강식품을 판매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던 일을 하게 되었었습니다.

아침8시 30분 출근해서 매장 정리하고 청소하고나면 9시 10~20분 정도의 시간이 되는데, 그때부터 동네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찾아와서 자리에 착석하며, 많은 어르신들이 한자리에 앉게되면 공연과 춤을 선보이면서 노래로 흥을 돋워주는 일을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퇴근시간은 2시 반에서 3시 사이였던걸로 기억이 되네요.

그렇게 지내다가 종종 결혼할 동갑 여자친구와 자주 만나고 또 함께 시간을 보내며 2001년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에 우리 결혼식을 올리자 하며, 2호광장에 그 당시에 잘 나가던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청첩장까지 다 돌리고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그러던 어느날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여자친구와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정장, 구두, 넥타이 등 을 미리 준비한 저는 그날도 어김없이 집에서 엄마에게 "다녀올께요" 하고 얘기하고 출근을 하였습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제가 그 예복을 입고 출근을 한 것입니다. 제가 그 당시 했던일이 정장을 입고 깔끔한 차림의 어르신들에게 이쁨을 독차지 받는 일이었거든요~

 

그날은 아직도 기억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네요...어떻게 일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의 날짜만큼은 정말 지울수가 없는것 같네요~

 

그날은 2001년 10월의 마지막 날인 10월 30일 이었습니다.시월의 마지막 날 굉장한 교통사고로 인생 완전 뒤바껴 버린 날이었으니 잊을 수가 없을것 같아요...

 

그날도 어김없이 정장을 입고 가야하기때문에 새로산 정장이나 한번 입어보자~하고 입고간것이 화근이었던것 같습니다.

 

저의 일하는 곳에는 저 말고도 일하는직원이 두명 더있었는데, 전부 남자로 저보다 두살 많았던 형이 있었고, 또 한명은 저와 친했던 친구가 한명, 이렇게 세명이서 함께 일을 하면서 서로 재미있게 이야기 하며 일이 일찍 끝나니까 끝나면 서로 시장에가서 탁주를 한잔씩하는 그런시간을 자주 보내곤 했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일이 끝나고 목포 석현동에 그 당시에 새로생긴 신청호 시장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제가 일하는곳에서 무려 15분 정도 같이 일하는 형 차를 타고가면 금방가는 거리였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차가 많이 없어서 도로가 많이 한산했었던걸로 기억이 되네요..지금보다는 많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새롭게 지어진 신청호시장의 한쪽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그때당시에 무슨 순대국밥집이라고 되어 있었는데..지금은 잘 모르겠네요...여전히 장사를하고 계시는지 아님 다른곳으로 이사를 간 것인지 말입니다.

 

그렇게 맛나게 탁주를 한잔하고 집에가려고 하는데, 같이 일하는 형이 "xx아 형 여자친구 만나러 독천 xx대학교 학생인데, 함께 가자" 하시는데, 저는" 형 죄송해요. 술도 먹었고 운전해서 가는건 좀 무리인거 같아요. 그리고 저 결혼 앞으로 10일 남았어요....저 안갈래요"라고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형이 떨거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이야기하는것이었습니다." 너 내일부터  두고 봐~어떻게 하는지" 그말에 정에 약한 저는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그렇게 하여 저는 그 형이 운전하는 차에 형, 그리고 제친구 다음으로 저 이렇게 세명이서 함께 독천에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게 된것입니다.

술을 다들 마셨기 때문에 저는 좀 걱정되기는 했지만," 뭐 별일이라도 있겠어?" 하는 마음에 함께 동승을 하게 되었었던걸로 기억하네요. 빨강 르망의 차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세명이서 형은 운전석에서 친구는 조수석에 저는 뒷자리에 타고 가게 되었는데, 저는 약간 술기운이 올라와서 뒷자리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뒤로 몇날 몇일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눈을 떴을때는 병원 응급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것이었습니다.

 

사고의 기억은 전혀 나지를 않고, 제가 자고 있는사이에 사고가 나서 제가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던 것입니다.

옆에는 엄마와 누나들과 형들이 함께 자리에 있었고, 제가 깨어난것에 그저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깨어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아버지가 몇년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아버지 얘기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한 말이 뭐냐면

" 아버지가 산에서 공부를 하고 계셨데요, 당연히 성경고부 하셨을거라 믿고 손에 들려있는 책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성경책이 있었다는 겁니다.그렇게 성경공부를 하고 계시는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아버지가 하는말이 (절실한 기독교 신자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에 저희 가족 모두 기독교에서 함께 찬양하며, 즐겁게 하나님을 섬기는 집안이었습니다.) [여기는 왜 왔냐며, 어서 가라면서 손으로 휘~휘~ 저의시며,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깨어났다고 하더라구요. 그렇지 않고 아버지가 어서오라며 함께 가자고 했다면 저는 아마 이세상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병원에 교통사고로 이송이 와서 정신을 차리고 또 제가 10일동안  깨어나지도 않고, 거의 반 식물송장이었던것이 전혀 믿을수가 없더라구요...

그때 사고의 경위가 어떻게 된거냐면~

독천의 길은 시골길이라서 지금도 일차선인데 그때에는 길이 더 많이 굽어져 있는 일차선으로 지금은 많은 복구로 심하게 구부러진곳이 없더라구요...

 

[신청호시장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독천으로 가자는 형의 말에 저는 뒷자리에 타고 바로 잠이 들어버렸는데, 그날따라 비가 좀 내리고 있어서 독천의 일차선 이었던 곳은 빗길에 도로가 좀 미끄러웠다고 하더라구요...
또 굽은 도로라서 차의 속도를 많이 줄여야 하는데, 그것을 취한상태에서 감지도 못하고 무리하게 빨리 가려고 차 주인이 형이 좀 속도를 냈는가 보더라구요.
그래서 차가 일차선 도로에서 굽은 도로이다 보니까 빗길에 굽은 도로를 정주행하지 못하고 커브길에 중앙선을 물면서 미끄러졌다고 하더라구요...
때마침 반대편에서는 차가 오고 있었는데, 그 차와 추돌해서 사고가 난 것인데 그때 저는 뒷자리에서 자고있었던 터라 차가 사고가 난것인지 그냥 혼자 박았는지를 모르는체 자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편에서 오던차가 우리의 중앙선을 물고가는 차를 피할수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사고가 난부분이고,그 사이에 뒷 문쪽과 후렌다 쪽을 박아서 반대편 문이 열리면서 저는 차 밖으로 떨어졌다고 하더라구요.
마침 그곳이 편도 1차로이고, 옆에 밭이 있었기에 살았지 그렇지 않고 그냥 편도 2차선이상이었다면 아마도 저는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서 운명을 달리 했을 수가 있었을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밭으로 떨어졌는데, 마침 지나가는 마을 주민이 119에 신고를 하여서 병원에 실려오게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병원생활을 전치 12주 나왔는데, 제가 다친곳을 보니까 이거는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차 문 밖으로 떨어졌는데, 왼쪽으로 떨어졌나봐요~

 

왼쪽으로는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몸의 왼쪽부분이 전부 다쳐있었던 것입니다. 

 

이야기 하자면 왼쪽 이마가 찢어져서 제 친구들이 와서 제 팔과 다리를 붙잡으며, 의사가 마취없이 이마를 꿰맸다고 하더라구요~

 

왼쪽 이마, 또 왼 팔꿈치, 왼쪽 갈비뼈 왼쪽 골반 으스러져서 두다리에 철심을 박아 추를 매달아서 다리를 침대밑으로 고정시켜 생활하여야 했습니다. 다리를 움직이려해도 전혀 움직여 지지가 않는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와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와는 함께 동거중이었는데, 여자친구가 병간호하면서 전치 12주를 치료를 간병하며, 지내게 되었던것입니다.

 

그때는 젊은 나이라서 빨리 몸이 회복이 되었나 봅니다.

워낙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었기에 쉽게 병을 이겨냈던거 같아요. 

 

그렇게 병원에서 치료를 마쳤는데, 의사선생님이 오셔서 하는말이 교통사고로 인한 "후천성 간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왼쪽 뒷 머리속에 피가 고여 있는데, 쉽게 머리라서 어떻게 피를 제거할 수가없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간질" 같은 경우에는 평생을 약을 의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한번 간질을 봤었는데, 그때' "간질" 걸린 사람을 보았는데, 멀쩡하게 생겼는데, 한번 발작이 일어나면 몸에 거품을 물고 뒤로 떨어지면서 몸을 바르르 떨면서 오줌이 나와버리는 것'을 보게 되어서 간질이라는 병이 지랄병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또 " 간질" 이라는 병은 몸을 편하게 뉘이고, 한 10분에서 15분 정도면 바로 정신 차린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저는 대수롭지 않게 저에게 생긴병이  사고로 인한 " 후천성 간질" 이라는 말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었습니다.

 

왜냐하면 약 만 잘 복용하면 생기지를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몸의 치료를 마치고, 그리 크게 외상은 나지않은 상태에 퇴원을 하게 되었는데, 병원에서 간질이라는 약과 함께 병원에 수시로 방문하고 통원치료를 하라는 의사의 말에 알겠다고 하며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사고난것을 잊고 생활하는 가운데 여자친구와의 결론 문제를 이야기 하자면, 퇴원하기 일주일 전에 그만 헤어지게 되어버린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여자 친구의 생각을 다 알수는 없겠지만, 저와 8년동안 사귀는 내내 아무래도 동갑인지라 자주 다투기도 하고, 나름 함께 행복한 시간도 갖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당시에 많이 다치게 되어 또 머리를 다친거에 대한 것도 있고,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스스로 생각했는가 봅니다.

함께 11월 11일에 결혼이 무효화 되면서 파혼까지 이르게 된것에 대한 책임으로 퇴원하게 되면 누구보다 더 잘해 주겠다고 여러번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만 저를 떠나 버린것입니다.

여자친구가 하는말이 " 싫은데 이유있어~" 라며, 얘기하는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제가 지인들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1년뒤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다고 하더라구요. 

 

전부터 직장을 다니던 여자친구는 사람만나는것을 좋아했고,

또 다른사람들을 상대하는 마트일에 종사하다보니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의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것입니다.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하고 다른 화제로 넘어갈께요..

 

그렇게 헤어지고 8년이라는 시간동안 많은 추억을 되새기며, 저는 정말 술로만 사는 그런 거럼뱅이가 되다시피 지내는 세월이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다음에 마음이 다잡아 지더라구요...

3년동안 눈에 보이는 술은 내입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엄마와 함께 지내며 살아가는데, 어느날 어머니와 함께  서울 외삼촌 딸 결혼식에 가게 된것입니다. 그렇게 서울에 올라가 큰 누나집에 있으면서 결혼식장에 다녀와 큰누나집에 하루 쉬고 목포로 내려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번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누나 집에서 컴퓨터로 게임을 하던 저는 갑자기 몸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제가 어~~어 하는 순간 쿵하고 옆으로 쓰러져 버린것입니다.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때  제가 발작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부천에 사는 누나집 근처 성모 병원에서 119로 이송하여 치료를 받는데, 얼마후 제가 깨어서 어떻게 된거냐고 엄마에게 물어보니까 컴퓨터 하다가 쓰러졌다고 하더라구요. 바지에 오줌을 저리기도 하구요.

 

그후로 다음날 목포로 낼려와 어머니와 목포 한국병원에서 병원을 들려 이래이래 얘기를 했더니, "후천성 간질병"은 약을 꾸준히 먹어줘야 머리가 제 기능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약을 지금까지 복용하게 된것이고, 또 왜 한국병원에서 지금은 전대병원을 다니게 되었냐면, 그것 또한 이야기가 길어서 다음 글에 적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적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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